▲오길남박사가 부인의 권유로 북한을 탈츨한 뒤 입북을 권유한 윤이상에게 가족의 구명을 호소했다.
윤이상은 북에서 건네받은 이 사진을 건네주면서 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은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이 사진의 배경이 요덕수용소라고 증언하고 있다(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93109)
윤이상의 딸이 죽은(1995년) 자신의 아버지 윤이상의 명예훼손 혐의로 창원지검 통영지청에 오길남 박사와 통영의 딸 송환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통영 현대교회 방수열 목사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고소했다. 고소이유는 부친(윤이상)이 월북을
권유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마치 윤이상이 권유한 것처럼 주장했다는 것이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에서 나이 40줄에 경제박사 학위를 따지만 마땅히 일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윤이상이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 없느냐" 는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자신과 부인 신숙자,
두딸과 함께 북한(1985년)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경제학자인 오길남 박사에게 북한체제에 대해 세뇌교육만 시키고 독일유학생 두명을 월북시키라는 지령을 받는다.
많은 고민 끝에 오길남 박사가 지령을 받는척 하며 독일로 돌아오고 부인과 두딸은 북한에 남겨두었다.
탈북후 오길남 박사 아내와 두딸이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최근에 평양 모처로 옮겨졌다 한다.
물론 월북 최종 판단은 오길남 박사가 결정했겠지만 월북 결정을 내리기까지 과연 윤이상과 송두율이 아무런 퍼포먼스가 없었을까.
나는 우선 잘못된 결정으로 가족을 데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월북을 감행한 오길남 박사를 탓하고 싶었다.
윤이상의 딸이 오길남 박사를 고소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윤이상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교사로도 재직하다가 1956년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1년쯤 생활하다가 베를린으로 넘어갔고 유럽의 많은 작곡가들과 교류하며 동양의 음악적 요소를 서양음악에 접목시켜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6ㅁ25 상처가 아물기전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시절인 1963년 4월부터 수차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를 만난 사실을 안 정부가
1967년 윤이상을 체포하자 유럽의 많은 음악가들의 탄원에 결국 특사로 석방되어 서독으로 추방된 자가 윤이상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사실 북한 김일성 살인정꼰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긴 당시는 북한이 남한 보다 더 잘살았고 모든 것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윤이상의 친북적이고 종북적인 행위보다 예술인을 탄압하는 남한 정부로 인식하였기에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과 압력을 받았다.
지금은 유럽이 북한의 인권 실태 상황에 대해 남한의 종북주의자들 보다 더 앞장서서 북한을 비난하고 있는것이 아니러니 한거다.
아무튼 그후로는 터놓고 북한을 왕래하며 김일성에 충성하며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골수 종북주의자 짓꺼리만 골라했다.
김일성을 위한 영화 배경음악 "님을 위한 교향시"로 김일성에게 15층 음악당을 하사?받기도 했는데 이 영화의 배경음악이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바뀌어 남한의 기생충 같은 종북주의자들이 대한민국 애국가 대신 부르는 민중의례곡이 된 연유가 그러하다.
그러니 윤이상은 남한의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대단한 인간인거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하는데 좌파정꼰 어느해에 윤이상 음악이 해금되어 통영에서도 음악제가 열리고 있다.
올해도 독일국적 윤이상 아내와 딸이 북한을 거쳐 통영에 왔다. 마침 통영사람(윤이상)이 어떻게 통영사람(신숙자/오길남 아내)을 월북
시켜냐며 여론이 일고 비난의 화살이 윤이상 가족에게 쏠리자 윤이상 딸이 오길남 박사를 고소한 모양이다.
윤이상 딸이 울려는 사람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격이다.
아무리 명백한 증좌가 없다하더라도 사실 정황은 윤이상에게 불리하면 불리했지 결코 유리한것이 절대 아니다.
고소로 인해 오히려 윤이상의 수면 아래에 드러나지 않은 종북적인 짓꺼리까지 수면위로 떠오르게 생겼다.
자기 억제가 약한 딸이 아버지의 명예를 더 한층 훼손시키는 장한 효녀가 될 듯 싶다.
히스테리 발작은 자기 암시가 강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허영심 또한 드센것이 원인이다.
윤이상 딸은 1950년 8월 태생인듯 한데 오길남 박사가 월북할 당시가 1985년이니 그때 나이가 35살쯤 되었을 것이다.
종북적인 부친 윤이상과 같이 살아오면서 그런 암시가 충분히 내재 되었을성 싶다.
그러다 보니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편하게 생각하기도 쉬운거다. 또한 평양에 가면 김일성, 김정일이 환대해주고 정원이 딸린 큰집에서
북한동포의 피고름을 짠 모든것으로 호위호식하니 허영심이 극에 달할 것은 뻔한 이치 아니겠는가.
결국 자기 승질을 이겨내지 못한 윤이상 딸의 히스테리가 오길남 박사 가족 월북 사건을 푸는 열쇠가 될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윤이상이 차디찬 지하에서 "이런.. 이런...어찌 내딸이 띨띨하기는..." 하겠지만 그나마 윤이상의 엽기적인 종북짓꺼리를 드러내고 푸는 단초가 되어 땡큐다.(⊙)
아래 링크된 주소는 『"구출! 통영의 딸" 백만엽서 청원운동, 통영의 딸 구해주세요.』
http://www.통영의딸.com/
'통영의 딸' 유괴, 작곡가 윤이상 외에 더 있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93109
'사는이야기 > 엉뚱잡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 수소폭탄 때문에 아기를 가져? (0) | 2016.02.05 |
---|---|
서울대하교의 시멘트 화단과 오폐수. (0) | 2012.05.02 |
명납(名衲)반열에 오른 명진승의 찌질법문. (0) | 2011.12.14 |
비야... 내맘처럼 내려라. (0) | 2011.06.29 |
원시종교인와 거룩한 문화인의 차이 (0) | 2011.06.17 |